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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크리스마스 때였던가? 두 권의 소설책을 선물 받았다. 한 권은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들을 모아놓은 작별이었으며, 한 권은 스토너였다. 선물 상자를 열 때 같이 들어 있었던 비누 때문에 풍겨지던 달콤항 향과는 다르게 뭔가 심히 우울하면서도 한편 무표정해 보이는 남자의 초상이 그려진 표지를 보며, 이 책을 미뤄버렸다. 지난 2주간 출근길에 읽을 책을 찾다가 스토너를 집어 들었고 매일 아침 나는 지하철에서 스토너의 삶을 지켜봤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20분이라는 시간이 너무나도 짧았고, 마치 트루먼 쇼의 방청객이 된 것처럼 그의 삶을 계속 관찰하고 싶었다.

 

우선 나는 소설책 서평은 거의 쓰지 않는 편이다. 흔히 말하는 고전에 대해서만 간혹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 떠오르던 장면과 내 삶의 단편적인 조각들을 엮어서 정리하곤 했었던 것 같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이후로 새롭게 추천할 소설을 못 찾은지 약 7년이 지났다. 그리고 오늘 마지막으로 스토너를 덮으면서 지인들에게 선물하며 권해줄 새로운 책 한 권이 추가되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기쁘다.

 

우선 시작하기 전에 이 책은 흥미로운 사건을 바라거나 놀라운 상상력, 웃음 등을 소설에서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추천하지 않을 것 같다. "요즘 사는게 너무 재미없지 않아요?" 라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는 후배에게 표지에 편지 한 편과 함께 슬며시 건내볼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굳이 소설에서 무언가의 색다름을 발견하길 기대하는 것 같다.

 

소설 뿐이랴 여행을 간다거나, 친구를 만나고, 영화를 보고, 맛난 음식을 하는 것 조차도 우리는 늘 일상을 단조롭지 않게하기 위해 시간에 다양한 색을 덧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우리의 삶은 일반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게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조직에서 혹은 어떤 사회에서 내 자신의 삶이 비참하게 여겨질 때 나는 스토너를 떠올릴 것 같다.

 

좋은 책이라면 왜 나는 한번도 못들어 봤던 것일까? 사실 조금 당황스러웠다. 책을 선물받았는데 내가 아예 들어보지도 못했던 책이라서. 찾아보니 유명해진지 오래된 책은 아니었다. 1965년에 미국에서 발간된 후에 50년이 지난 뒤, 영국 워터스톤에서 2013년에 올해의 책으로 선정하며 주목을 받은 책이라고 한다. 존 윌리엄스는 아마 저세상에서 엄청 웃었을지도 모르겠다. 책마저도 스토너의 삶 같구나라며...

 

ㅡㄴ

스토너의 삶

 

스토너의 삶은 책의 맨 앞에 요약이 되어 있는데, 이 이야기가 이 책의 전부이다.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p.8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스토너에게 그의 아버지는 농사짓는 새로운 방법을 배워오라며 농과대학 입학을 권한다. 책에서 묻어나는 뭔가 촌스럽고 가난해보이는 부모가 자식에게 새로운 기회를 권하는 모습과 그 "너희 어머니와 난 어떻게든 견딜 수 있을것이다."라고 하는 말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그런 부모의 기대를 뒤로하고 대학에서 영문학 강의를 듣다가 영문학을 전공하는 교수가 되는 스토너에게도 그들은 동일한 말로 그의 선택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의 부모가 돌아가실 때까지 이런 장면이 몇 번 정도 더 등장하는데, 나의 삶에서 매번 자신들의 가치관을 접고 묵묵히 나를 지지해주었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생각났다. 

 

특히 아버지는 나에게 늘 그런 말을 하곤 했었다. "우리 생각은 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을 일단 해라." 나 때문에 늘 우시던 어머니는 내 앞에서 울지 않으셨고, 늘 뒤에서 보이지 않은 곳에서 우셨다. 그것을 안 것도 오래되지 않았다. 그 때마다 아버지는 엄마를 뒤로하고 "엄마도 이해해줄거다.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을 해라. 잘 해봐." 라고. 지금도 매일 같이 야근을 하고, 무언가 결국 재미있는 것을 해보겠다고 이리저리 진로를 휙휙 바꿔가며 고군분투하는 나에게 우리 부모님은 여전히 같은 입장으로 응원해주시고 있으시다. 스토너 때문에 갑자기 아버지의 이런 모습이 생각나서 출근길에 전화를 하기도 했다.

 

이 때까지는 이 소설이 성장소설이라고만 생각했다. 소세키의 <도련님>이나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에서> 등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들이 떠오르며, 스토너가 어떻게 성장하며 어떤 사건들을 겪아갈지 기대했던 것 같다.

 

존 윌리엄스

 

평범한 삶 - 저항도 없는.

 

사실 그 이후로 이 책은 스토너라는 한 인물의 불행한 결혼 생활과 가족 생활, 뭔가 심심한 우정, 대학 사회의 알력 다툼, 사랑하는 딸과의 정서적 단절 등에 대한 스토리를 나열한다. 이 소설에서 어떤 상황을 맞이하는 스토너를 보면, 알게 모르게 그를 응원하게 된다. 그리고 또 응원하게 된다. 그러다가 아 진짜 너 왜그러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기대하는 강렬한 어떤 저항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캐서린과의 불륜의 장면에서 겨우 그의 용기를 한번 정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디스와의 답답한 결혼생활을 어떻게 더 나아질 수 있도록 노력하거나 과감히 끊어내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가장 행복해 보이던 순간인 어린 딸과의 시간을 빼앗은 아내에게도 맞서지 않는다. 자신의 세미나 수업을 묘하게 망쳐놓은 워커에게 저항하려하지만, 워커의 지도교수인 로맥스와의 싸움에서는 결국 크게 저항하지도, 그와 크게 부딪혀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가족의 안정된 삶이 위협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맥스에게 맞서거나 아부를 하지도 않고, 부당한 대우 속에서 자신이 할 일을 담담히 찾아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생각을 했다. 책을 읽다가 내 삶의 어떤 면과 소설의 장면이 묘하게 동일한 모습으로 마주하고 있을 때, 이 소설이 정말 픽션인가? 저 스토너의 모습이 왜 나의 모습 같을까. 그 순간부터 매일 아침 지하철을 타는 20분을 기다리게 되었던 것 같다. 때로는 그의 선택과 행동들을 인정하기 싫은 마음이 어쩌면 지금 내가 살아내고 있는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 정리해야할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의 순간들이 나의 이야기 같았고, 그가 나 같았다. 내가 연인들에게 느끼던 감정, 동료, 교수, 직장상사에게 느끼던 모든 감정들이었다.나는 나의 길로 담담히 걸어가지만,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평범한 나의 삶의 모습이랄까.

 

가끔 어떤 학생이 이 이름을 우연히 발견하고 윌리엄 스토너가 누구인지 무심히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고 애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스토너의 동료들은 그가 살아 있을 때도 그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의 이름을 잘 입에 올리지 않는다. - p.8

 

기억해 보면 나도 무언가 소신을 지키려고 좀 더 젊을 때는 강하게 저항해보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런 결단이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고 칭송받는 경험은 드물고, 시간이 지날수록 삶은 그로 인해 꼬이는 인생은 너무나 피곤하다. 그렇게 나는 그리고 우리는 사회에 길들여져 어떤 변화도 저항도 없이 모든 것을 그러려니 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 삶의 풍경이 유채색이 아니라 무채색이 되는 경험... 이 책을 읽다보면 그런 무채색의 공기가 늘 느껴졌었다.

 

어떻게든 흘러간다

 

책의 후반에 가면서 스토너는 삶에 대한 허망함을 느끼는 모습을 종종 보인다. 그런데 그 허망함이 허무함이라기 보다는 누구나 느낄 수 있는 '현타' 같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열심히 분명히 열심히 살아간다. 문학에 대한 열정이 누그러들지 않고 자신의 수업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이 강화된다. 어찌보면 일개 대학의 무명 교수로서 잘난 것은 없지만 자신의 삶을 기만하지 않고 포기하지도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모습 때문에 스토너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진다.

 

한편 이 교수의 삶을 시간순으로 관찰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냥 모두가 그렇게 사는거구나. 어쩌면 작가는 그런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살다보면 다 그런 일이 있는 법이며, 세월이 흐르면 다 잘 풀릴 것이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그냥 한 명의 스토너로 살아가는 것이다. 눈오는 오후 이 책을 덮으면서 그의 삶을 하나씩 되짚어보았다. 밋밋하게 반전 하나 없는 소설이었다. 캐서린이라는 젊은 여자를 만나서 갑작스런 불장난을 하는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스토너라서 그런지 그 불륜 마저도 내 눈에는 실패가 뻔히 보이는 흑백 불장난이었다.

 

슬픔과 고독의 모습이 강조되어서 그렇지 스토너는 자신이 열정을 가지는 일을 발견하고, 그 일에 매진한 행복한 사람일수도 있다. 죽기 전 그는 병상에서 여름날 오후의 풍경과 밖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넌 무엇을 기대했나?'라는 질문을 몇 번을 되뇐다. 소설의 전반이 회색 빛이었던 것에 반해 마지막은 푸른색의 느낌이었다. 그래서 묘한 감동이 오는 것 같다. 

 

쉬우면서 어려웠고,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는 소설이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이야기를 정말 풀어낸 문장들이 단순하지 않아서 좋았다. 이 소설을 선물해준 분에게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스토너
국내도서
저자 :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 / 김승욱역
출판 : 알에이치코리아(RHK) 2015.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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