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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졸업 이후 처음 스타트업에 참여했을 때가 생각난다. 우리나라의 제2의 스타트업 붐이 실컷 불어오던 2015년이었다. 봄바람이 가실 무렵 선릉의 한 스타트업 지원센터의 구석에서 책상을 받았다. 곧 해외에서도 국내에서도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IR을 해야하니 여러가지 자료를 수집하고, 현재 생산중이고 곧 출시 계획을 발표한 제품을 어떻게 잘 포장해서 피칭을 할지 생각을 하는 업무를 받았다.

 

거시적인 통계, 업계의 방향성, 제품의 상세한 기능을 논리적으로 잘 조합했었다고 생각하지만, 서비스를 기획한다는 것이 참 디테일 해야하고 집요해야한다는 것을 잘 몰랐었다. 그 당시에도 개인적으로 많은 글을 읽고 많은 케이스 스터디를 하며 서비스 기획에 참여했었지만, 돌이켜보면 참 어설펐다. 다양한 기회를 받고 다양한 고민을 하면서 지금의 나로 성장하는 발판이 된 시간이었지만, 무언가 늘 내 안경이 아니라 남의 안경을 쓰고 있는 기분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이유가 첫째, 정말 이 업계에서 잘하는 사람이 일하는 것을 실제로 옆에서 본 경험이 전무하였고, 둘째, 본인이 잘하던 사고방식과 접근법을 멀리하고 당시 만연한 시중에 나온 스타트업식 기획 방식만을 쫓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늦었지만 때로는 이런 반성을 해야한다. 5년이 훌쩍 지나버린 이후에도 이런 유혹은 언제나 위기의 순간에 찾아오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험과 사고력을 믿지 못하고 타인의 방법론을 차용하는 것 만큼 위험한 일이 있을까?

 

누군가가 나보다 이 분야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조언을 구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의 방법론과 접근법은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다. 또한, 그 방식이 정답으로 보이는 순간 나의 성장 한계를 그 사람의 그릇으로 멈춰버리게 된다. 그런 내가 정신을 차린 건 1년 뒤에 흘러들어간 국책연구기관에서 였다. 연구는 그렇다고 쳐도 운이 좋아서 큰 사업의 연구 기획에 참여를 하면서 묘한 느낌이 들었다. 나보다 먼저 경험이 많은 선배들의 시야가 좁아 보였고, 나는 그곳에서 나름 특출난 연구원이 되었다. 이는 연구에만 갇힌 사고가 아니라 나름 그 이전부터 몇 번을 겪어온 사업기획과 운영에서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연구 자체 보다는 사업을 발주하는 기관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보다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재작년 다시 사기업으로 나와서 온라인, 오프라인 마케팅을 비롯해서 각종 서비스 기획에 참여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느낀 점은 세상의 수많은 기획에는 변하지 않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은

 

1. 이 서비스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타겟)

2. 최종적으로 그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니즈)

3.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그것을 할 수 있게 해줄까? (서비스)

4. 그러기 위해서 어떤 사람과 파트너, 시스템이 필요할까? (자원)

5. 어떻게 돈을 받고, 나는 이를 위해서 무엇을 사야하는가? (수익과 비용)

6. 결국 나는 어떤 가치를 그들에게 선물한 것인가? (밸류)

 

라는 것이다. 이런 고리타분한 내용은 논리력과 상상력으로 연필을 들고 노트에 끄적이면서 하나씩 채워나가는 것이다. 가능하면 많은 레퍼런스를 찾아보면서, 때로는 전혀 다른 것을 찾아보면서 하나씩 살을 붙여 나가면 된다. 그런데 정작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빠르게 실행을 할 것인가인데, 이를 위해서는 연구원 생활을 했던 습관이 의외로 도움이 되었다. 

 

그냥 무언가를 밝히기 위해서 접근하면 안된다. 정보의 집합으로 결론을 내리려고 하면 결코 안되는 것 같다. 최소한 '~은 ~이다'라는 나만의 잠정적 결론이 필요하다. 이를 검증할 하나의 가설로 보고, 어떻게 가설을 검증할지 액션플랜을 빠르게 세우고 실행하는 것이 좋다. 틀리면 어떠한가 빠르게 고치면 된다. 검증에는 설문조사가 있을 수도 있고, 인터뷰를 통해 물어볼 수도 있다. 상황이 허용한다면 데이터를 통해서 테스트를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최대한 방향의 피벗(pivot)을 다양하게 시도하여 '타겟이 원하는 니즈를 충족시켜줄 서비스'를 빠르게 만들어내는 실험이다.

 

이 접근은 묘하게 연구과정과 닮아 있다. 무언가 관심을 갖은 현상이 왜 그런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 연구이다. 그런데 이를 위해 1) 연구가설을 세우고, 2) 방법론을 선정하고, 3) 이를 통해 수차례 가설을 검증해 나가며, 4) 결론을 내린다. 최종적으로는 연구결과를 읽을 만한 대상이 구독하는 저널에 적정한 시기에 논문을 게재하여 나의 연구를 판매한다. 거시적으로 보면 이를 통해서 비슷한 연구를 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그들과 네트워크를 쌓아갈 수 있으며, 그 분야의 유/무형적 자산을 쌓을 수 있다. 최종적으로는 그 분야에 하나의 가치를 선물한다.

 

지난 며칠간 혼자서 급하게 어떤 서비스의 벤치마킹, 포커스그룹인터뷰(FGI) 설계, 진행, 정리, 기획안 작성 및 최종 인사이트 도출을 통한 서비스 방향 설정의 업무를 숨가쁘게 진행했다. 어쩌면 정보의 합으로도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설문의 결과를 통해 표면적 해석을 제시할 수도 있었고, 인터뷰 대상자들이 내뱉은 말을 그대로 따와서 이 사람들은 이런 것을 원하더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또한, 이미 잘 나가는 회사들의 서비스에 있는 이런 기능을 우리도 해야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겠다.

 

그럴 때, 조금만 호흡을 늦추고 연구자의 마인드로 돌아가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아무리 시간이 부족해도 다시 한번 "왜 그렇지"와 "그래서 무엇"을 고민하면서, 숫자를 이리저리 조합해보고 글들을 이리저리 묶어 본는 것이다. 나에게 그런 시간이 더 주어지지 않는 것이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리지만, 이런 고민의 방법과 흔적들이 동료와 나 사이에 결정적인 차별성이 생길 수 있는 지점인 것 같다. 

 

결국 처음보다 나은 결과는 반드시 나온다. 결국 무언가를 덮고 있는 모레를 붓으로 한번 두번 쳐내며 희미하게 나마 이정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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